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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종가를 찾아서

<안동 종택 여행 2>
<농암종택>
 이육사선생의 따님  이옥비 여사와 점심을 먹고 난 후, 여사의 안내로 예정에 없던 ‘농암종택’으로 갔다. 이옥비 여사는 이곳이 안동에서 제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는데, 가서 보니 과연 주변 풍경이 아름다웠고 가송천이 흐르는 곳에 넓게 자리 잡은 고택이었다.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은 청량산과 낙동강이 어우러진 풍광이 한 폭의 그림처럼 수려했다. 1370년경 건립된 농암종택은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17대손 이성원선생이 이곳에 새로운 터를 잡고 안동 시내 여러 곳에 흩어졌던 유적과 유물을 모아 복원한 것이라 한다.

 농암고택은 '어부가'로 알려진 조선시대의 문인 농암 이현보선생이 태어나 평생을 살다 돌아가신 곳이다. 종택은 선생의 17대종손 이성원선생과 종부 이원정씨 부부가 지키고 있었다.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 별채, 문간채 등으로 본채를 구성하고, 긍구당· 명농당 등의 별당이 있는 구조다. 별채인 긍구당은 농암종택의 상징적인 건물로, 방을 뒤로 배치하는 대신 앞면에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달고 개방하여 운치를 살렸다. 
 특히 낮은 담장이 이채로웠는데 담장 너머로 가송천의 은빛 모래사장과 바위 절벽의 목가적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택을 에워싼 산과 강, 그 가운데 집이 하나로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사랑채 마루에는 선조가 친히 집안에 내린 '적선(積善)'이란 글자가 양각으로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었다. 농암종택 인근에 후학들이 농암 선생을 위해 지은 분강서원(汾江書院)과, 농암이 부모님을 위해 지은 정자 애일당(愛日堂)이 자리하여 작은 한옥촌을 이루고 있다.
 종부 이원정 여사가 쟁반에 안동식혜와 시원한 수박을 들고 나왔다. 이원정 여사가 손수 만든 음식이라고 이옥비여사가 넌지시 일러준다. 농암종택 대청마루에 앉아 귀한 음식 안동식혜와 수박을 대접받고 맛있게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안동식혜는 물김치처럼 붉은 고춧가루 국물에, 삭힌 밥알이 들어 있는 음식이었다. 약간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처음 먹어 본 맛이라 조금 생소했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년 ~ 1555년)> 
 이현보는 조선의 연산군과 중종 때의 문신으로 문인이며 학자이다. 자는 비중, 호는 농암 본관은 영천이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 사간을 거쳐 정언으로 있을 때, 어지러운 정치를 논하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호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예안(禮安)으로 돌아가 산수와 더불어 독서와 시작(詩作)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는 특히 문장에 뛰어나 자연을 노래한 시조가 많이 있는데, 10장으로 전하던 <어부가>를 그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에 실려 있다. <효빈가(效嚬歌)> <농악가> <농암가(聾巖歌)> 등이 그의 저서인 <농암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애일당(愛日堂)> 
 효자인 농암은 1512년 늙은 부모를 위해 안동 도산면 분강 기슭에 정자를 짓고 '애일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애일'은 '하루하루의 날을 아낀다.'라는 뜻으로, 나이 드신 부모를 봉양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한 심정을 '애일'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1519년 가을, 안동에서는 큰 잔치가 열렸다. 안동부사였던 이현보는 성별과 신분을 불문하고 80세 이상의 노인을 모시고 '화산양로연'(花山養老燕)을 열었다. 청사 마당과 마루는 수백 명에 이르는 노인들로 가득 찼으며 농암은 노인들의 흥을 돋우려고 때때옷을 입고 춤을 췄다. 1533년에는 부친과 8명의 마을 노인을 애일당에 모셨는데 9명의 노인이 애일당에 모였다는 뜻에서 이날의 모임을 '애일당 구로회(九老會)'라고 이름 지었다. 이때 농암은 이미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정2품 홍문관 대제학이었지만 노인들 앞에서 여전히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1569년에 열린 애일당 구로회에는 퇴계 이황도 69세의 나이로 참석했다. 농암의 부친 이흠을 중심으로 결성된 구로회는 부친이 세상을 뜨면서 농암 자신이 회원이 되었다. 이후 아들과 손자 후손들이 대를 이어 회원이 되었고, 1979년 마지막 모임을 가질 때까지 약 5백 년 동안 농암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 잡아왔다. 

<오천유적지(烏川遺蹟地)> 
 농암종가의 종부와 이옥비여사의 안내로 종택을 구석구석 돌아볼 수 있었다. 이옥비 여사는 오전에 병원 예약이 돼 있었는데, 우리를 만나느라 예약시간을 늦추어 두었었다. 예약시간이 되어 아드님이 태우러 오기로 한 와룡면사무소에서 내려 드리고, 우리는 여사가 가보라고 한 오천유적지로 향했다. 20여 채의 한옥이 있는 오천군자마을이 아름다운 풍광에 어우러져 마을에 들어서면서 부터 눈을 크게 뜨게 하였다. 군자 마을은 군자들이 사는 마을이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오천유적지는 조선초기 광산김씨 예안파(禮安派)가 세거해 온 집성촌으로 김효로가 처음 터를 잡은 뒤 후손들이 500년 가까이 살아 왔다고 한다. 원래의 장소는 낙동강 가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이들 소유의 문화재를 모두 산중턱인 현재의 장소로 옮겨왔다. 마을 전체를 돌아보며 사진을 찍었다. 종택과 종택에 딸린 정자가 가슴 설레게 아름답다. 집 안팎을 드나들며, 또는 정자를 올려다보며 옛사람들을 떠 올렸다. 조선 중기 역사의 인물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추사김정희 등, 이곳을 드나들었던 역사의 인물들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오천 유적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태양이 뜨겁게 내리 비치는 날씨가 매우 더웠다. 땀을 닦으며 여덟 개의 정자와 종택과 그 밖의 건물들을 구석구석 살피며 분주히 마을을 누비고 다녔다.
  • 글쓴날 : [2021-06-30 19: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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