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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종택(鶴峰宗宅)

<안동 종택 여행 5>
<학봉 김성일 종택>
이정표를 따라 봉정사 가는 길에 있는 서후면 운계리의 학봉종택을 찾아갔다. 학봉종택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로 조선중기의 문신 학봉김성일(1538∼1593) 선생의 종가이다. 김성일은 선조 1년(1568)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과 수찬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퇴계의 제자로 뛰어난 성리학자이기도 한 그의 학문은 이후 영남학파의 학문 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학봉은 임진왜란 초기에 초유사의 소임을 맡아 의병의 발기와 지원에 크게 기여했고, 경상우도 관찰사가 된 뒤로는 관군과 의병을 함께 지휘하여, 1592년 10월 임란의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에 참전하였다. 그 이듬해 4월 각 고을을 순시한 뒤 다시 진주성으로 돌아와, 피로와 풍토병이 겹쳐 4월 29일 진주성 공관에서 56세로 운명했다. 
 종택으로 들어가기 전 대문 바깥마당에 차를 세우고, 마당 왼쪽에 있는 기념관에 먼저 들어갔다. 기념관에는 학봉선생이 생전에 썼던 문집 편지글, 유서통, 각대, 가죽신 등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 유서통은 1592년(선조 25년) 4월 11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제수 된 학봉이, 왕의 유서를 넣어 가지고 다니던 통이라 한다. 그밖에 낡은 책상과 임진왜란 때 쓰던 칼과, 학봉이 부인에게 보낸 한글 편지도 있었다.
 기념관을 돌아보고 대문을 들어서자 전통정원의 모습을 갖춘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진다. 정원 마당엔 파릇한 잔디가 깔려 있고 단아한 자태의 작은 소나무가 서있다. 왼쪽으로는 사랑채가 보이고 맞은편에 학봉선생 유품과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과 옛 문서를 보관하는 운장각(雲章閣)이 있다. 정원마당으로 들어서니 고택을 지키는 16대 종손 김종길선생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다. 그는 삼보 컴퓨터 CEO를 지내고 은퇴 후에 낙향하여, 고택을 지키며 도선서원선비문화수련원 원장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김종길선생이 운장각 잠을쇠를 열었다. 웬만해서는 열지 않는 유물관이라며 특별히 문을 열어 안을 볼 수 있게 하고, 설명을 해 주어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운장각 안에는 학봉 선생의 친필원고와 선생의 안경과 벼루를 비롯하여 고서 56종 261점, 고문서17종 242점이 있고, 보물이 두 점이나 있으며, 습도조절장치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운장각을 나와서 정원 뒤쪽으로 보이는 학봉선생의 위패(位牌)를 봉안한  3칸 규모의 사당(祠堂)은 문이 닫혀 있었다. 사당 외관을 찍고 있으려니 김종길선생은 그곳도 열어 주겠다고 했다. 정말 웬만해서는 안 연다는 사당 안을 볼 수 있게 해 주었고, 사당 안에 안치된 학봉선생의 위패까지 찍을 수 있어 감사했다. 처음 인사할 때 종택순례 글을 쓰려한다고 말했던 것이 이런 대접을 받게 되었다. 선생은 자신이 쓴 책과 CD까지 챙겨 주며, 김성일가의 독립운동사와 제봉고경명의 아들과 학봉가의 인연까지 들려주었다.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해 주는 친절함에 감사함을 표시 하고 학봉종택을 떠나왔다.  

<학봉과 고경명>
 학봉 집안은 광주의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1533~1592)집안과도 끈끈한 인연이 있었다. 제봉 집안은 임진왜란 때 삼부자가 순절한 것으로 유명한데, 제봉과 그의 둘째아들은 1592년 7월 10일의 금산전투에서 함께 전사하였고, 제봉의 큰 아들은 얼마 있다가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당시 60세였던 고경명은 둘째 아들과 금산전투에 참가하면서, 16세의 막내아들 고용후(高用厚)를 경상도의 학봉 집안으로 보냈다. 
 학봉 집안에 내려오는 기록과 구전에 의하면 고경명은 아들을 보내면서 “너는 어머니를 모시고 경상도 안동 금계의 김학봉선생 댁을 찾아가 피난을 하여라. 그 집은 의리가 있는 집이니, 난리 중에 너희들을 그냥 죽게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중에 고씨 집안 일가족 수십 명은 학봉집안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 난리중이라 먹을 것도 변변찮았지만 같이 죽을 먹고, 산나물을 먹으면서 고생을 함께했다. 그 와중에 고용후는 금산전투에서 함께 전사한 아버지와 형님의 소식을 접하였고, 얼마 후 학봉도 진주성을 지키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운명하였다는 소식이 왔다. 학봉 집에서 4년 동안 피난하였던 고씨 일가는 광주로 되돌아왔다. 
 아버지를 잃은 고용후와 할아버지를 잃은 김시권(金是權)은 비슷한 연배로, 학문에 힘써, 1605년 과거시험에 나란히 합격하였다. 10년이 지난 1617년 고용후는 안동부사로 부임을 하여,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학봉의 부인과 큰아들 김집을 관아로 초청하였다. “두 분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하고 큰 절을 올렸다. 약 400여 년 전 영남과 호남의 선비집안이 보여 주었던 아름다운 우정과 미담이다. 

<조선 놀음판의 큰손으로 불렸던 파락호 김영환>
  일제 강점기 안동에서 파락호로 이름을 날리던 학봉 김성일 종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은 노름판에서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어 돈을 따면 좋고, 돈을 잃게 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자루에 담아 사라졌다. 노름으로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수 백 년 동안 종가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도 다 팔아먹었다. 한번은 시집간 외동딸이 신행 때 친정집에 가서 장농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돈을 받아왔는데, 이돈 마저 김용환이 노름으로 탕진했다. 딸은 빈손으로 시댁에 갈수 없어, 친정 큰 어머니가 쓰던 헌 장농을 가지고 울며 시댁으로 갔다.  
  1946년 김용환이 세상을 떠난 후, 파락호 노름꾼인줄 알았던 김용환이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알려졌다. 김용환은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군군자금을 만들기 위해 노름꾼,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가족들에게조차 함구하고 노름꾼으로 위장한 삶을 산 것이다. 임종 무렵에 독립군 동지가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하니, “선비로서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1995년 김용환이 건국훈장을 추서 받던 날, 시댁에서 장롱 사라고 준 돈을 아버지가 노름으로 탕진하여 큰어머니의 헌 농을 가지고 갔던 김용환의 딸 김후옹여사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 라는 글에 담아 발표 하였다.
  • 글쓴날 : [2021-08-30 21: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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