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안석이 형 왜 그랬어?

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하는 취향이 있어서인지 종종 현실 상황을 역사에 비추어보는 버릇이 있다. 개혁을 표방하고 집권한 문재인 정부들어서 추진한 각종 개혁적인 정책들이 실패를하거나, 혹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있는 상황들과 오버랩되는 것이 곧 송나라 말기 신종시대에 왕안석(王安石)이 추진했던 각종 개혁정책이다.
신법(新法)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왕안석이 추진했던 각종 개혁정책들은 송나라 말기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 필요성과는 무관하게 시간이 지나면서 실패로 끝났고 송(宋)은 망하고 말았다. 
전성기를 지나서 쇠망의 길로 접어들 당시의 송은 서하(西夏)와 요(遼)의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려야 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서 막대한 재원을 그들에게 바치고 있었고, 용관(冗官)으로 상징되는 불필요한 관리들과 군사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해 재정의 80%를 써서 국가재정이 이미 파탄 난 실정이었다. 
대상인(大商人)들에 의한 경제적 독점과 지주들에 의한 농촌의 경제력 집중 또한 심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식적인 사고를 하는 위정자라면 당시 황제였던 신종(神宗)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는 필연이자 당위였던 것이다.
지면의 한계로 왕안석의 개혁정책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만 살펴보자.
먼저 기금을 만들어 농민들에게 대부를 해 줌으로써 농민들이 고리대금에 시달리지 않게 했다(靑苗法). 균수법(均輸法)을 통해서 각지에서 중앙정부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공납제를 개선했다. 이는 조선시대의 대동법(大同法)과 유사하다. 
또한 모역법(募役法)을 실시하여, 농가가 재산별로 면역전을 내게 하고 역이 면제된 관리에게도 조역전을 징수한다. 그 돈으로 실업자에게 품삯을 지불하여 일을 시키고 형평을 시도한다.
이 정도면 누구나 수긍할 정도로 합리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왕안석의 개혁은 중국에 통일제국이 세워진 이래 전례 없는 규모로 단행된 것이고, 개혁의 목적이 백성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며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 목표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개혁은 대부분 실패했다. 
그것은 왕안석의 개인적인 단점과 개혁실행 과정의 모자람들이 일부 있기도 하였으나 주로 보수파들이 품고 있었던 강력한 반감 때문이었다.
아무리 좋은 개혁이라도 모두를 만족시키는 개혁은 없는 법이다. 개혁의 반대자들이 빌미를 잡을만한 틈은 있게 마련이고, 또 개혁을 반대하는 자들의 대부분은 ‘기득권층’이고 풍부한 물적토대와 인적자산이 있는 까닭에 ‘장삼이사’의 반대와는 애초부터 ‘급’이 다르다.
처음에는 소수의 기득권자들이 반대하지만 점차 확대되어가고, 끝내는 개혁의 수혜자들까지 개혁을 반대하는 지경에 이르고야만다. 
왕안석이 농민들의 고리대금을 없에려는 정책에 그 고리대금으로 이익을 누리던 지주들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공납제를 개혁하는 것에 공납물을 통해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던 상인들이 반대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그런데 종국에는 고리대금으로 수탈을 당하던 농민들이나 공납을 통해서 막대한 부당이익을 빼앗기고 있었던 백성들이 반대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물론 시행과정에서의 정밀함이 결여되어 있었던 점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렵다. 
현 정부의 ‘종부세’ 논란에서 보듯이 종부세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종부세로 인해서 여러 가지 혜택이 자신들에게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종부세를 반대하고 욕하는 상황이 당시에도 있었던 것이다.  
현 정부의 정책 기조인 ‘부의 재분배’는 또 어떤가? ‘부의 재분배’ 정책이 기존에 부자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빼앗아 나누어주자는 정책이 아님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상식이다.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가능하지도 않다. 다만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소득에 대해서 보다 평등하게 나누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의 재분배나 ‘소득 불평등 해소’는 한마디로 ‘공산주의’ 정책이 돼버렸다. ‘최저임금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역사를 보면 왕안석의 신법과 기존 구법(舊法) 관리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논쟁과 소모적 투쟁이 있었다. 지금의 진보 · 보수 논쟁은 비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본과 자본이 통제하는 언론, 정치권력 등을 과점적으로 가지고 있는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 간의 싸움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결과는 뻔한 것이다. 
왕안석은 ‘진보주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망해가는 송나라를 지키려는 보수적 실용주의자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 당시에 ‘시민의 권리’나 ‘복지’ 등의 개념이 있었을리 없으니 왕안석은 오직 나라를 튼튼히 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백성들의 상황을 개선시키려 했을 뿐인 것이다. 
개혁을 하지 않으면 송나라는 망하기 직전의 상황이었음에도 기존의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왕안석의 개혁정책으로 인해서 나라가 망해간다고 외쳐댔다. 요즘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어떤가? 존재 자체가 오직 정권 흠집내기인 언론과 수구 기득권세력들의 짬짜미는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중국이나 한국이나를 불문하고 개혁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담 모퉁이에 몇 가지 매화꽃(墙角數枝梅)
추위를 무릅쓰고 홀로 피었네(凌寒獨自開)
멀리서도 알겠네 눈이 아닌 걸(遥知不是雪)
은은한 향기 날아오고 있으니(爲有暗香来)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왕안석이 그저 그런 관리로서 평안한 삶을 누리면서 위의 시와 같은 뛰어난 문장만을 남겼다면 그는 훗날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에 버금가는 것은 물론이고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으뜸으로 꼽혔을 것이다. 
그럼에도 험난한 ‘개혁가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왕안석의 삶을 돌아보자면 내 뇌리를 스쳐가는 몇몇이 있다. 
안석이 형 왜 그랬어?
  • 글쓴날 : [2021-06-30 19:21:43]

    Copyrights ⓒ 파주신문 & www.pajunews.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