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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과 등나무

나는 갈등으로 시를 쓰고 사랑 한다 1

-칡과 등나무

 

시인 장종국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폴 오스타(Paul Auster)의 저서 글쓰기를 말하다에 수록되어있는 공감 가는 구절이 마음에 찬다.

 

글쓰기는, 내게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 글을 쓰지 않으면 상태가 더 나빠진다.”면서 질문을 던진다. “왜 쓰는지, 그것을 쓰는 목적은 무엇인지 의심을 품는 순간이 많다.”라고 말하듯 끊임없이 의심을 품고 번뇌에 직면하면서 더 나은 작품을 쓰고, 더 나은 작가가 되기 위해 진정성 있는 고뇌에 빠져들게 마련이다. 그래야만 오직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주제와 이야기 문장들을 발견하고 창조해낼 가능성이 생긴다.”고 말한다.

시의 목표는 언어의 순수성과 일관성이지만, 산문은 갈등과 모순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라며 시인에서 소설가로 변신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글쓰기는,

그 수단이 어떤 것이 되었건 장인정신의 수공업적 활동으로 번민하며 갈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혼의 심연으로부터 힘겹게 길어 올려야만 하는 정신과 육체적 고역의 산물이다.

나의 시와 사랑도, 내외적 갈등으로 빈틈없이 짜여있는 그것에 얽혀있음을 풀어내고 사랑하면서 아이러니를 창출해내는 육체노동자인 셈이다.

 

갈등(葛藤)의 사전풀이는 칡넝쿨의 얽힘과 같이 일이 복잡하게 뒤얽혀 알력을 낳게 되는 상태나 관계, 서로 상치되는 견해와 처지, 이해 따위의 차이로 생기는 충돌등으로 기록되어있다.

갈의 한자어 은 칡 이다. 칡은 전국의 산과 들에 흔하게 자라며 덩굴이 주위의 나무를 휘감아 타고 벋어 나가는 콩과의 낙엽 관목으로 갈잎덩굴나무이다. 속명은 츩넝굴, 달근, 침덩굴 등 많은 속명을 가지고 있다. 오랜 동안 구황식물이 되기도 하고 약재로 쓰이기도 하는 친근한 나무이다. 여름이 접어들면 잎겨드랑이에서 보랏빛꽃봉오리가 차례로 벌어지면서 분홍빛과 자줏빛 꽃잎이 어우러지면서 분홍빛과 자줏빛꽃잎이 어우러져 그 사이에는 노란 빛도 섞이는 꽃이 아름답다.

 

등의 한자어 은 등나무 이다. 식물이름은 참등으로 전국의 산과 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으며 꽃이 아름답고 향기가 좋아 관상용으로 인기가 높은 콩과의 갈잎 덩굴나무이다. 칡덩굴과 등나무 덩굴의 특징은 등덩굴의 특징은 줄기가 왼쪽방향으로 감싸고, 칡덩굴은 오른쪽방향으로 감싸는 특성이 있다. 산과 들을 걷다보면 칡덩굴에 감겨 죽은 나무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이처럼 오른쪽으로 감고 왼쪽으로 감아올린 풀리지 않는 꼬임을 덩굴에 비유하여 갈등이라는 은유적 합성어가 탄생하였다. 갈등의 바이러스는 자신을 갉아먹기도 하고 사회와 국가 간 이해와 이득이 발생하는 많은 관계 속에 풀리지 않고 꼬여 서식하고 있다.

 

서양의 문화권에서 갈등(conflict), ‘confligere'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하는데 서로 상치되는 생각 때문에 고민하는 심리적 상태로 서로 부딪치며 충돌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토대로 말하자면 갈등이란, 둘 이상의 개인이나 집단 또는 조직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들 간의 심리적 대립감과 적대적 행동을 내포하는 동태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말 이성계의 다섯째아들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드렁칡처럼 얽혀보자는 단가를 지어 보내니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로 답하였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자

며 이방원이 <하여가>를 띄우니, 정몽주는 <단심가>로 응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이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우리나라 전통놀이의 하나인 줄다리기 놀이가 있다. 그 중 영월지방 칡줄다리기 놀이는 그 유래가 다른 고장의 경우와 다르며 줄의 재료가 칡덩굴이다.

 

조선시대 단종은 지존의 자리에서 쫓겨나 어린나이에 귀양살이를 하게 됐다. 이에 백성들은 동정과 울분을 참기 어려워 그의 복위를 간절히 희망했다. 세조 조정에서는 이러한 기운을 억제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친구는 단종은 억울하니 복위돼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그 가능성을 역설했고, 조정 편 한 친구는 불가능할 것이라며 나라 사정이 어지러우니 주견 있는 어른이 통치를 해야지 어린 사람이 어떻게 하겠느냐며 반론을 제기하면서 친구들끼리 갑론을박하다가 줄다리기로 판가름하자고 하여 줄다리기를 했다. 이때 여러 친구들이 양편에 가세하여 줄당기기를 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 고장의 칡줄다리기가 유래되었다.

1967년부터 영월지방 문화행사의 하나로 단종문화제를 시행하면서 매년 4월 마지막 금요일부터 3일간 칡줄다리기 행사를 치루고 있다.

 

칡덩굴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 때 재상 류성룡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임진강에 칡덩굴로 다리를 놓았다는 일화가 있다.

징비록에 의하면 15931월 류성룡이 칡덩굴로 대형부교를 만들어 5만 대군을 안전하게 도강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평양성을 탈환한 류성룡은 서울로 내려가던 중 임진강의 얼음이 녹아 발이 묶이고 만다. 이에 류성룡은 칡덩굴을 엮어 동아줄을 만들어 강 양편에 매달아 놓고 무게를 견디도록 칡덩굴 사이에 짧은 막대를 빗살처럼 배열해 다리를 완성하고 나무와 갈대 흙 등으로 발판을 다진 다음 명나라 군사들이 말을 달려 지나가고 화포와 병기를 운반하는 등 모든 군사가 강을 건널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비록 임시로 설치한 다리였지만 현대의 현수교 못지않은 대 발명품이었다. 류성룡의 칡다리에 관한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에도 찾아볼 수 있으며, 고종의 고문이자 역사학자인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1863~1949)에 의해 언급되었다. 헐버트는 금속활자와 거북선 한글을 포함한 류성룡의 조교(弔橋)를 조선의 4대 발명품으로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였다. asistch@hanmail.net



 

 



  • 글쓴날 : [2021-05-05 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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