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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산장(避署山莊)

북경에서 피서산장까지 (3)

 

피서산장(避署山莊)

 

승덕 가는 길

유리창 거리에서 나와 승덕으로 출발했다. 승덕까지는 210km 거리이다. 가다가 고속도로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 버스에서 내리지 않을 긴 시간 동안 전주문화원장을 지낸 서 선생이 마이크를 잡고 한중일 삼국의 얽히고설킨 고대사를 설명한다. 승덕 시내에 들어서니 건물들이 크고 번화하다. 버스는 연암 박지원이 지나간 '열하(熱河)'를 지나쳐 간다.


한국식당

시간이 늦어 저녁식사부터 하기로 하고 한국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1층에 자리가 없어 지하방에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입에 맞지 않는 중국음식에 질려 있던 터라 기대에 부풀었다.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를 시켰는데 30여명이 갑자기 들어 와서인지 음식이 빨리 나오지 않는다. 한참 만에 빈 테이블에 반찬도 없이 밥부터 놓고, 조금 있다가 반찬 가져오고, 그러고도 더 기다려서 된장찌개~ 또 기다려서 김치찌개를 가져 왔는데, 각자 한 뚝배기씩이다. 그런데 맙소사~ 뚝배기가 넘칠 만큼 국물이 한강이다. 맛이 있을까? 기대 반, 우려 반, 숟가락에 국물을 떠서 입에 넣고 삼키기도 전에, 혀가 싱거운 맛부터 감지한다. 찌개에 맹물을 들어부었나? 한국에서라면 절대 못 먹었을 음식을, 배가 고파서 김치 건더기만 건져 먹었다. 된장찌개를 먹는 사람들도 배가 고프니 그냥 먹는 것 같다. 밥도 푸실푸실한 게 찰기가 없다. 배가 많이 고팠지만 조금 밖에 먹지 못했다. 한국식당이라지만 중국인이 하는 곳이었다.

식사 후에 피서산장이 바라다 보이는 경추봉에 올라가려고 했더니 시간이 늦어 문이 닫혀있었다. 피서산장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경추봉은 중국의 4대 정원 중 가장 큰 규모이며, 정상까지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다. 경추봉의 다른 이름은 강희제가 지었다는 봉추산이라고도 하는데, 높이는 38.29m이며 약 16200톤의 무게의 바위로 하나님의 엄지손가락으로도 불리는 신기한 모양이다. 올라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장

피서산장은 강희제의 생일연회에 참석하는 6촌 형 박명원을 따라 간 박지원이, 돌아와서 열하일기를 쓴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출입구에 길게 늘어선 줄 끝을 따라 피서산장 현판이 걸려있는 궁궐 문을 들어섰다. 피서산장을 다 돌아보려면 하루 온종일을 보아도 다 못 볼만큼 넓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아서 잠깐만 눈을 돌려도 일행을 놓칠 수 있다. 일행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구경하는 틈틈이 곁눈질로 돌아 봤지만, 사진 찍고 돌아서니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찾을 수가 없다. 빠른 걸음으로 찾아봐도 나와 붙어 다니던 일행 세 여인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일행이 보이기에 그들을 따라 붙었다. 또 놓치면 큰일이다 싶어 궁궐 건물을 들어가 보기도 하고, 여기저기 구경하면서도 수시로 힐끗거리며 그들을 죽어라 쫒아 다녔다.

피서산장의 궁궐 건물 밖으로 나가니 호숫가에 있는 큰 바위에 빨간색 글씨로 피서산장이라 써있다. 사람들이 바위 옆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기에 나도 차례를 기다려 한 장 찍는다. 호수는 드넓어 시원스럽고 호숫가에 늘어진 버드나무 잎이 낭창낭창하게 흔들리는 풍경이 아름답다. 호수를 질러 아치형으로 만든 다리 위에도 사람들이 가득하다. 연인들이 사진 찍는 풍경은 더 없이 예쁘다. 피서산장을 둘러보고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던 시간에 맞추려면 슬슬 나가야 한다. 같이 다니던 분들을 놓칠세라 뒤꽁무니에 따라 붙는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 아직 아무도 없는 걸 보니 조금 이르게 도착했나보다. 한 여름의 태양은 이글이글 뜨겁게 타고 나무 한그루 없는 피서산장 입구에서 일행을 기다리노라니 땀이 쉴 새 없이 흐른다. 같이 다니던 한 분이 사준 아이스크림을 먹고 더위를 식혔다.

 

* 피서산장 避署山莊

피서 산장은 높고 긴 벽으로 둘러싸인 이궁(離宮)이다. 청의 강희제가 1703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87년간에 걸쳐서 1790년 건륭제 때에 완성되었다. 황제들은 베이징의 더위를 피해 매년 4월에서 9월까지 6개월 동안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기 때문에 제2의 정치의 중심지라고도 하였다. 여름에도 시원하고 지하에는 온천이 많아 겨울에도 냇물이 얼지 않기 때문에 열하(熱河)행궁 라고 한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 세 번째인 피서산장은 산과 물 사이에 자리 잡은 제국의 중심이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황궁 자금성(紫禁城)과 비하면 백옥으로 높이 쌓아 단도 조성하지 않고 화려한 색채의 오지기와도 얹지 않아 피서산장의 대궐은 수수하고 검소하다. 청색의 벽돌에 회색의 기와로 된 피서산장의 건물들은 우아하고 말쑥하며 참신해 보인다. 입구에서 시작되어 아홉 겹의 뜰을 지나 양쪽에 계속되는 건물들의 곧게 뻗은 복도는 황실의 웅장함과 위엄을 나타낸다.


* 열하일기-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중국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장인 '피서산장'이 있는 '열하'로 가는 여정을 적은 기행문이다. 1780년 박지원은 청나라 황제(건륭제)의 생일축하 사절의 일원으로 베이징을 방문한다. 하지만 건륭제가 더위를 피해 열하의 피서산장에 가 있어서, 사절단은 황제를 만나러 다시 열하로 간다. 4개월여의 여정을 기록한 열하일기를 통해 연암은 당시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당시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복속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오랑캐라며 무시 하고,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의 전통을 조선이 이어받았다는 '소중화주의'에 빠져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청나라 문물이 우리보다 앞서 있고 배워야 한다는 연암의 열하일기는 청나라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당시 북학(北學)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북학파들이 부국강병책으로 제창한 것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용거와 용벽을 들 수 있다. '용거'는 가난의 원인을 유통ㆍ교류가 제대로 행해지지 못한 데 있다고 보고 수레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고, '용벽'은 주택, 성곽, 누대,분묘, 창고 등 토목건축에 광범위하게 이용할 수 있는 벽돌 제작을 위해 조벽기술(造技術)을 도입하자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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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날 : [2021-05-05 22:5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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