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명, 청 시대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내던 天壇

북경에서 피서산장까지 (2)

 

, 청 시대 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내던 天壇

소현세자와 남당(南堂)

버스에서 내리니 작은 공원 안쪽으로 천주교 성당이 보인다. 남당은 남 천주당의 준말이다. 마주 보이는 벽면에 1605년에 이 성당을 지은 예수회의 마테오리치(Matteo Ricci) 신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남당은 북경에서 제일 처음 세워진 오래 된 성당으로 청나라의 건륭제 40(1775)에 불에 타 다음해에 중건하였고,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또 다시 훼손되어 광서제(1904) 때 다시 건축한 것이다. 청의 세조(世祖)가 하사한 천주교당 비문 두개가 성당 앞마당 왼쪽 벽면에 세워져 있는데, 글자가 마모되어 읽을 수가 없다. 성당 내부는 돔 형식의 천장이 위엄을 더해주고, 햇빛을 머금은 스테인드글라스 성화가 아름답다.

남당은 조선 사신들이 묵었던 옥하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조선 사신들과 예수회의 서양 신부들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에 서학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 성당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있던 소현세자와 인연이 있는 곳이다. 아담 샬(A. Shall) 신부는 조선에서 온 왕자가 심양에 있다는 말을 듣고 만나보고 싶어 했다. 소현세자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심양에서 북경의 남당에 와서 아담 샬 신부와 교류하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서양의 문화에 대해서 듣고는 배우고 싶어 하였다. 신부로부터 성경과 성물과 서양 물건을 선물로 받은 소현세자는 성경책은 이교(異敎)의 책이라 생각해 신부에게 돌려보내고, 다른 물건들은 조선으로 돌아 올 때 가지고 와 인조에게 보여줬는데, 그때 인조는 몹시 화를 냈다고 한다.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원인 모르게 급사 하였고, 며느리 민회빈 강씨는 역모 죄를 쓰고 죽고 말았다. 인조는 세 명의 어린 손자들까지 모두 제주도로 귀양 보내, 둘은 병으로 죽고 셋째 손자만 살아남았다. 참으로 비정한 아버지요, 할아버지가 아닌가.

 

천단공원

천단은 명나라 영락제 18(1420) 때 건설 한 것으로, , 청 시대에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나, 기우제와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을 올릴 때 사용했던 건물이다. 현존하는 고대제단 건축물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완벽하게 보존 된 것이라 한다. 입구에서 천단 건물로 들어가는 길에는, 곡선으로 이어지는 회랑이 있어 뜨거운 햇빛을 가려준다. 회랑 끝에서 큰 문으로 들어서니 눈앞에 높은 석축의 둥근 단 위에 엄청난 크기의 원형 제단이 있었다. 높은 돌계단을 올라가, 문 앞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헤집고 나도 제단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제단 앞에 커다란 붉은 기둥이 둘러 서 있었고, 금색과 붉은 무늬로 장식한 작은 기둥 사이로 보이는 몇 개의 계단 위쪽에 제단이 보인다.

면적이 273만 평방미터로 넓은 천단공원에는, 커다랗게 둘러 ᄊᆞ고 있는 담 안쪽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음악을 가르던 신락서(神樂署), 단폐교, 장랑, 칠성석, 구룡백 등의 건물이 있고, 안쪽 중심건물인 기년전황궁우’ ‘재궁’ ‘원구, 여러 건물을 둘러싸고 또 하나의 담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7월 말의 날씨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더워 쉴 새 없이 땀이 흐른다. 연신 땀을 닦으며 건물 안을 들여다보고 다니다 시원한 곳을 찾아냈다. ‘기년전의 건축 내용을 전시 해 놓은 건물 안에 설치된 에어컨이, 겨울철 창호지 구멍으로 들어오는 황소바람 같았다.

 

유리창 거리

천안문(天安門) 광장 서남쪽에 위치한 유리창거리는 서예와 골동품 중심의 문화거리이다. 유리창은 본래 해왕촌(海王村)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13세기 원나라 때 채색유리를 굽는 가마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유리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서 만든 채색 유리기와는 황궁 뿐 아니라 절을 지을 때도 사용했고, 부자 집에서도 사용하게 되어 점점 번창하게 되었다. 유리창은 황궁과 가깝게 위치해 있어, 지방에서 북경으로 과거시험 보러 온 많은 선비들이 자연스레 모여드는 곳이 되었다. 장사꾼들은 과거시험 보러 온 사람들을 위해 이곳에 책방을 만들었다. 과거를 보러 북경에 온 사람들 중에 과거에 낙방한 사람들은 자신이 쓰던 책, , 벼루를 팔아 고향으로 돌아 갈 노자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 후 청나라가 멸망하자 몰락한 귀족 자제들이 문중에서 소장하던 귀중한 골동품을 팔아 생활을 하면서, 유리창은 도서, 골동품, 문방구, 서예의 전시장과도 같은 문화의 거리가 되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유리창 거리는 상점 하나하나가 전통 건물이어서 중국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유리창 문화거리는 동가(東街)와 서가(西街)로 분류되는 750m 거리이다. 거리 양 편에는 과거의 건물을 모방해 1층 혹은 2층의 중국식 건물을 지었는데, 실내는 목각과 채색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청조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동가에서는 주로 옥기, 도자기, 보석과 목기를 경영하고 서가에서는 주로 서예와 문화재가 있다. 유리문을 통해 가게마다 물건들이 환히 들여다보인다. 이곳에서는 중국 각 시대의 물건들을 거의 다 찾을 수 있는데, 천문학적 숫자의 가격을 가진 진짜 문화재도 있고 정교한 복제품도 있다. 이곳에 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래된 가게들 중에, 1672년부터 시작해 3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보재가 있다. ‘영보재는 중국전통문화 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데, 영보재에서만 가능한 "목각수인(木刻水印)"은 중국전통 각판인쇄를 토대로 발전시켜 서예작품의 흐름과 색채에 따라 몇 개의 각판을 만들고 원작을 기준으로 점진적으로 인쇄한 것이다. 사용하는 종이와 묵, 물감 등, 원료가 원작과 같고 복제술이 뛰어나서 모조작과 원작은 거의 분별하기 힘들 정도로 똑 같아 글씨를 쓴 원작가도 진위를 알기 힘들 정도의 수준이라고 한다.

옥으로 만든 것은 가격이 비싸 감히 살 엄두를 못 내고, 다기를 파는 상점에 들어가 보았다. 써 붙인 가격을 보니 물건 값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싸다. 차를 좋아하는 이에게 주려고 두 개를 샀다. 나하고 같이 샀던 두 사람은, 저녁에 호텔에 들어와 열어 보니 깨져 있다고 울상이다. 내가 산 것은 다행히 이상이 없었다.

  • 글쓴날 : [2021-05-05 22:57:05]

    Copyrights ⓒ 파주신문 & www.pajunews.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