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1일차- 7월 3일 월요일

<은, 상, 주>의 나라 중원을 찾아서 1


지난번 여행기는 국내여행으로 안동 답사를 썼고, 이번엔 아직 싣지 못한 고조선을 가 보려한다. 내 나라 네 나라 할 것 없이 세의계가 하나로 코로나19에 막혀 버렸으니 서로 오가던 경제와 문화와 예술까지 오도가도 못 하는 실정이다. 이번 길은 2017년 7월 3일부터 10일까지 10일 예정 길이다. 들릴 예정인 곳만도,<제안- 무릉- 전화산-고묘-낙양-소림사-정주-학벽-안양-제녕-곡부-태안-제남>까지 강행군이다.
 
  대한한공을 탁고 인천항을 떠나 잠시 날아 시안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남쪽으로 40km 가서 도상촌의 무릉 박물관이 있었다.
<곽거병>묘의 묘 앞의 말 동상 아래 훈(흉노)족이 깔려 있는데 짓밟아 버린다는 뜻으로 석상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장안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사용하고 있다. 박물관 안에는 수많은 거대한 인물들이 말을 타고 있는 석상이 있었다. 여기저기 세워져 있었다.
  박물관 우측으로 나오니 하나의 산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묘였다. 그곳에 같이 여행 온 재야사학자들의 말로는 신라김씨의 조상 ‘김일제’묘라고 한다. 비석에 <金日磾>라는 이름이 선명하다. 네 사람의 신라김씨 성을 가진 분이 나와 차를 올리고 절을 한다. 그곳에서 나와 1km 떨어진 한무제 능에서는 사진만 몇 장 찍었다. 무릉은 한무제(유철)의 능으로 전한의 제 7대 황제(재위 기원전 141년~기원전 87년) 훈족과 남월을 침공하고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요동지역에 한사군 설치했던 인물이다.
 
김일제(金日磾 기원전 134년~기원전 86년)
  김일제는 훈족 번왕인 휴도왕(休屠王)의 장남으로 14살 때 소년 장수 곽거병(霍去病)에게 잡혀 포롤 끌려와 말 기르는 노예로 한무제의 말고삐를 잡았다고 한다. 
  망하라의 무제 암살 시도를 막아 그 공으로 노예에서 해방. 거기장군, 마감, 시중, 부마도위, 광록대부에 올랐다. 이후 김씨 성을 받았으며 신라의 왕족이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다. 무덤은 한무제의 배장묘 오른 쪽에 있다.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그를 마신(馬神)이라 부른다.

사후
  김일제가 몸져 누우니 소제는 곽광과 의논하여 작위를 다시 내렸고, 김일제는 인수를 받은 지 하루 만에 죽었다. 작위는 아들 김상이 이었으나 김상이 죽은 후 아들이 없어 봉국이 폐지되었고, 이후 김일제의 증손 김당(金當)이 다시 투후에 봉해졌다.
  김일제의 무덤은 무릉의 배장묘 가운데 하나로서 곽거병의 묘 오른쪽에 있는데, 오늘날 감숙성 흥평현(兴平县) 남귀향 도상촌에 있다. 감숙성 무위시에 김일제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마신(馬神)이라 전해져 내려온다.

  김일제의 자손들은 신나라 때 왕망의 외가로서 주요 관직에 올랐는데, 후한 광무제가 왕망을 토벌할 때 역사에서 사라지고, 봉국도 몰수되었다. 중국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은 김일제가 봉지로 받은 투현으로 현재 입구에 이 사실을 알리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투후 유적지에는 김일제를 기리던 사당(祠堂)인 투후사(秺侯祠)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일제의 자손들은 대대로 벼슬하여 후한 때까지 가문이 이어져, 김선과 김의 등을 배출하였다.


시내 회족거리 야경을 보려고 출발. 화려한 야경애 사람들이 북적-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 온 무슬림들도 중국에 정착. 소수 민족 회족의 전통양식을 볼 수 잇었다. 11시에 숙소로-

  • 글쓴날 : [2021-12-28 00:46:30]

    Copyrights ⓒ 파주신문 & www.pajunews.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