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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과 소수서원

<안동 종택 여행 6>

풍천면 병산리의 병산서원은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은 낮은 산길로 굽이굽이 낙동강을 끼고 돌아 든다. 3~4km의 울퉁불퉁하고 다소 험한 비포장 산길을 승용차로는 빠르게 달릴 수 없어 천천히 내려갔다. 산길을 내려서자 너른 벌판에 강물과 모래사장이 에워싸고 있는 병산서원엔 많은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경사진 길을 따라 서원으로 들어가는 복례문(復禮門)을 들어서니, 만대루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서원 주변에 몇 년 전에 왔을 때처럼, 배롱나무 꽃이 만개하여 분홍빛으로 환하다.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1613년에 창건되었다. 병산서원은 원래 고려 말,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으로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이었는데, 1572년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그 후 1614년에 존덕사를 세워 유성룡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철종 14년(1863)에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다. 
 서원 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높직이 올려 져 있는 만대루 아래, 기둥 사이를 지나 만대루로 올라서니 앞으로 낙동강이 휘돌아 나가고, 강 뒤로는 병산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는 풍경이 눈이 시리게 사로잡는다. 
 병산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으로,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한국 건축사에 중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사적 제 260호로 지정된 병산서원에는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서애 류성룡(1542년 11월 7일~ 1607년 5월 31일)은 조선 중기의 관료이며 인문학자, 저술가로도 정평이 나 있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상도 의성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조부는 간성군수 유작(柳綽)이고,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퇴계이황의 문하에서 김성일과 같이 동문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정치계에서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이산해, 정인홍 등과 결별하고 따로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과 원균을 천거하여, 선조임금으로 하여금 이들을 각각 전라도와 경상도의 방어책임자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순신이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울 수 있게 하였고,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소수서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은 전에도 여러 번 다녀왔던 곳이지만, 갈 때마다 다른 감흥을 받는다. 정문을 들어서서 소나무가 양쪽에 도열해 서 있는 길을 따라가면 소나무 숲에 통일신라의 당간지주인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가 의연히 서 있었다. 소수서원에는 또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영정이 있고,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소장되어 있다. 
  소수서원 정문 앞에서 오른 쪽으로 강물 건너편을 바라보니, 바위에 붉은 색으로 쓰여 있는 경(敬)자가 여전히 선명하게 보인다. 정문을 들어서면 영정이 보관되어 있는 영정각 안에 주자, 주세붕, 이덕형, 이원익, 안향의 영정이 안치되어있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조선 중종 37년인 1542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1543년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1550년인 명종 5년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정문 안에는 또 다른 건물로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위치해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재와 서재를 두는데,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 구분한다.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서원중의 하나이다. 
  소수서원 자리는 원래 통일신라 때 창건된 사찰 숙수사(宿水寺)가 있었다. 이는 서원 입구에 서 있는 보물 제59호 당간지주와 소수서원 부지에서 신라대의 불상 등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증명이 되었고, 현재 소수서원 사료전시관 앞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숙수사는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다 소수서원의 건립으로 폐사된 듯하다고 한다. 당간지주는 중앙에 세로띠를 새기고, 네모난 기둥 끝으로 올라가면 약간 가늘어지면서 맨 끝은 둥글게 경사지도록 하였다. 꼭대기 끝 안쪽 면에는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원래는 지주와 당간을 받치던 바닥돌이 있었을 듯하나, 현재는 지주 양쪽으로 길고 큰 돌 1장씩이 놓여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돌을 다듬은 솜씨도 세련되어 보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소수서원 경내를 들어서니 다른 관광객들이 있는데도, 고요한 게 마치 경건한 기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선비의 고장이며 조선시대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병산서원과 소수서원을 둘러보고 또 다른 곳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오순희
한국수필작가회이사
  • 글쓴날 : [2021-10-04 13:4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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