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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종택 여행 4> 퇴계종택과 도산서원


<퇴계 종택>
오천 유적지에서 조선 중기 양반가의 주택과 사당 정자 등, 옛 마을을 산책하듯 돌아보고 도산서원에서 멀지않은 퇴계종택을 찾아갔다. 퇴계종택(退溪宗宅)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건축물로, 1982년 12월 1일 경상북도의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대학자인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종가로, 퇴계의 영손 동암(東巖)공이 한서암 남쪽에 지은 가옥이다. 퇴계선생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오면서 1715년에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을 건축하였고, 10대 사손 고계(古溪)공이 동남쪽 건너편에 새로 집을 지어 옮겨 살았다. 1907년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불을 질러 두 곳의 종택이 모두 불타버렸고, 지금의 건물은 1926년∼1929년 사이에 13대 사손 하정(霞汀)공이 이곳에다 새로 지은 것이다. 
 
 퇴계종택 솟을대문 앞에서 들어가려다 보니, 대문 양쪽에 붙어있는 봉천리(奉天理) 계오생(啓吾生)이라 쓴 대련이 눈길을 끈다. 하늘의 이치를 받들어 나의 생을 일깨운다는 뜻이다. 
 종택의 열려 있는 솟을대문을 성큼 들어서, 대문 안쪽으로 몇 발작을 더 들어갔다.  높다란 댓돌 위 툇마루에 흰 모시 한복을 곱게 입은 종손 어른이, 어린 손자들을 데리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옛 그림만 같다. 그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마당 옆 중문을 통해 뒤 쪽 건물로 들어섰다. 중문 안쪽에 살림집인 안채와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정자가 들여다보였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열려 있었지만, 문 옆에 ‘문화인은 남의 내실이 궁금하지 않습니다.’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안채까지 들어가는 관광객들이 있는 모양이다. 예의 없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니 그런 글을 붙여놓은 것일 터이다. 
 안채를 지나치면 좁은 마당 담장너머로 곱게 단청을 입힌 사당이 보인다. 오늘따라 퇴계종택에 우리일행 말고는 다른 관광객이 없어 조용하고 적막하여,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가만가만 조심스럽게 내 딛는다. 추월한수정 앞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다시 중문을 나오다보니, 어린손자들은 어디로 가고 종손어른만 마루에 앉아있어 가벼운 목례를 하고 종택을 물러 나왔다. 
 
<도산서원>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따라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엔 소나무가 줄을 지어 도열하듯 서 있어 경치가 매우 수려하다. 도산서원은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나마 평일이어서 서원을 돌아보는데 여유가 있어 구석구석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성리학을 말할 때 대두되는 유학자는 퇴계와 더불어 파주 자운서원의 율곡을 말한다. 학문적으로 쌍벽을 이루는 두 사람이지만, 35년의 나이 차이만큼이나 도산서원과 자운서원의 차이도 무척 크다. 서원의 규모도 규모려니와 안동에는 지금도 퇴계를 추모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서원의 구석구석을 살피려니 파주에 살면서 자운서원을 아끼는 나로서는 그저 부러운 마음뿐이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도산서당을 설립하고 후진들을 양성하였고 특히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과 명종 그리고 선조에게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이 유학을 부흥 시키는데도 큰 영향을 주었다. 퇴계 선생은 1569년(선조2년) 임금과 조정 중신들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향리인 안동 도산으로 돌아가면서, 동고 이준경, 고봉 기대승, 학봉 김성일, 세 사람의 인재를 추천하였다. 이준경은 2년 연상으로 영의정에 지냈고, 기대승은 26년 후배로 퇴계의 대표적인 제자이며, 학봉은 향리의 37년 후배로 수제자였다. 
 도산서원내의 상덕사와 전교당은 보물로 지정 되었고, 유물 전시관 옥진당을 비롯하여 전사청, 장판각 등, 서원이 갖추어야할 요소들이 적재적소에 잘 배치되어 있다. 
 선조7년에 퇴계의 학문과 덕행을 추앙하는 문인과 유학자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재 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하였다. 선조8년에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물들은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검소하게 꾸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도산서원 맞은 편 강 가운데에 정조 때 지방 별고를 보던 ‘시사단’이 있다. 시사단은 조선 정조 때 지방별과를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1792년 정조는 퇴계 이황의 학덕을 추모하여 규장각 각신 이만수를 도산서원에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곳 소나무 숲에서 과거를 치러 영남 인재를 선발하게 했는데, 이때 응시자가 7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796년 그곳에 단을 설치하고 비와 비각을 세웠다. 비문은 영의정 번암 채제공이 썼는데, 1824년에 비각을 개축하면서 비석을 새로 새겼다. 
 서원 옆, 도산서당은 명종16년(1561)에 건립한 것으로 퇴계가 직접 설계한 것이다. 도산서당, 농운정사, 역락서재 등이 도산서당 구역에 속한다. 서원구역에는 강당인 전교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 상덕사가 있으며 주변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퇴계는 <도산십이곡>에서 도산서원의 수려한 경관에 대해 적었고 강세황은 산수화 <도산도>를 그려 그 풍경의 아름다음을 묘사하였다. 
  • 글쓴날 : [2021-08-03 20:5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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