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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유적지(烏川遺蹟地)의 정자

<안동 종택 여행 3>
탁청정
탁청정은 탁청(濯淸)김유가 1541에 지은 광산 김씨 종택에 딸린 정자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앞면보다 옆면의 칸 사이를 넓게 하여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습의 팔작지붕으로 마루는 난간을 돌렸다. ‘탁청정’이라는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이고, 마루에는 퇴계 이황 등 당시 유명한 학자들의 시구 현판이 걸려있다. 영남지방에 있는 개인 정자로는 가장 웅장하고 우아한 건물이다. 

  김유(1491~1555)는 활쏘기에 능하여 무과에 서너 번 응시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벼슬에 나가는 것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평생 독서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그가 세운 탁청정은 규모가 웅장하고 모양이 화려하여 오랫동안 인근에서 이름을 떨쳤다. 김유는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고 그를 찾아오는 빈객을 진심으로 접대하였다. 평생을 고향에서 지냈으나,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농암이현보, 퇴계이황, 학봉김성일, 서애류성룡, 우복정경세, 한강정구 등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과 시를 짓고 글을 논했다. 그가 남긴 한문필사본 『수운잡방(需雲雜方)』은 우리나라 최고의 요리서 가운데 하나로 총 121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각 항목의 서술내용이 재료의 사용에서 조리, 가공법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이고 상세하여 당시 안동 주변의 식생활 형태는 물론 우리나라 전체의 식생활을 추정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설월당(雪月堂) 
 설월당은 김부륜(金富倫: 1531∼1598)의 호이자 그가 지은 정자의 이름이다. 김부륜이 관직에서 물러나 오천에 정사를 지을 때, 스승인 퇴계가 친필로 "설월당"이란 편액을 하사하자, 자신의 호로 삼고 이곳에서 독서로 소일하며 여생을 보냈다. 설월당은 오랜 세월 방치된 채 퇴락해 있었는데, 1930년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중수하였다. 

  김부륜은 김성일 이발 등과 교류하며, 1555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경천참봉 돈영부봉사 등을 제수 받았다. 1585년 전라도 동복현감으로 부임하여 향교를 중수하고 봉급을 털어 서적을 구입하는 등 지방교육 진흥에 많이 공헌하였으며, 임진왜란 시 가산을 털어 향병을 지원하였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설월당(雪月堂)’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저서로 「설월당문집(雪月堂文集)」이 있다.  
 
후조당(後彫堂)
 후조당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 후조당 김부필(1516∼1577)이 지었다고 전하는 별당건물이다. 광산 김씨 예안파 종택에 딸린 별당으로, 종택은 별당·정침·사당·재사·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정침에 부속된 건물로 팔작지붕집이고 앞면 4칸·옆면 2칸의 '一'자형에 오른쪽으로 2칸 마루와 방을 달아 'ㄱ'자형을 이룬 큰 규모의 별당이다. 정침 왼쪽 담장 안에 있으며, 정침으로 통하는 협문과 정문을 갖추었고 왼쪽에는 사당으로 통하는 신문(神門)이 있다. ‘후조당’이라는 현판은 스승인 퇴계 이황의 글씨이다. 대청의 천장에서 고서 및 문집류, 고려 말기의 호적, 조선시대의 호적·교지·토지문서·노비문서·각종 서간류 등 희귀한 전적류가 발견되었다. 

 김부필의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彫堂)이다. 약관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6세에 퇴계 선생의 제자가 되었다. 퇴계의 제자가 된 지 수년이 지났을 무렵 퇴계는 그에게 ‘그대는 관도에 오르기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지만, 일차 상경하여 임금을 한 번 배알한 뒤에 마음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서신을 보내 왔다. 그에 대해 후조당은 ‘벼슬을 뜬구름으로 여긴다.’는 시로 답하여 사양하였다. 그의 저서로 『후조당문집』이 있으며, 퇴계는 그의 주자학 연구가 자못 깊고 정확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크게 감탄하여 그에게 글을 보내기를 ‘우연히 공과 모여 의혹되었던 바를 연구함으로써 전날에 잘못 이해하였던 점이 많음을 깨닫게 되어 기쁘다’고 하였다. 
  
계암정 
 계암정은 김령(1577~1641)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이다. 김령의 자는 자준(子峻), 호는 계암(溪巖)이다. 광해군 4년 문과에 올라 승문원정자, 승정원주서 겸 춘추관 기사관에 옮겼으나 대북과 소북이 서로 대치하여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묘를 지켜야 한다는 핑계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김류, 이귀 등이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나라를 걱정하던 이들을 중용할 때, 계암도 사헌부지평에 임명하였다. 한양으로 가는 도중에 충주 달천에서 김곡(金穀)이란 선비를 만나, 이번 반정을 거사할 때 새 임금을 사제에서 맞이했는가, 아니면 새 임금이 의군에 함께 가담했는지 물었다. 인조가 직접 의군에 가담했었다는 말을 듣고는, 혀를 차고 탄식하며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아프다는 핑계로 되돌아왔다. 인조 4년 청나라가 침략했을 때,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가산을 털어 의병을 도왔다. 문집 2책과 40여 년간의 일기가 전한다.

침락정(枕洛亭) 
 영남 의병대장 김해의 아들 김광계(金光繼: 1580∼1646)가 조선 현종 13년(1672)에 세운 누정으로, 일명 운암정사라고도 한다. 집 이름은 ‘정(亭)’이지만 일종의 강당 건물로, 학문을 강론하고 시(詩)를 짓기 위한 모임을 열기도 하였다. 앞면 4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팔작지붕집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인데 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양쪽에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정자로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에 속하며 간소한 양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김광계의 자는 이지(以志) 호는 매원(梅園)이다. 광해군 때 세상이 어지러워 문을 닫고 학문을 닦으며 심성을 기르기에 전념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도 출세 영달을 탐탁히 여기지 않아서, 낙동강 언덕의 수석이 아름다운 한 절벽인 낙천위에 침낙정을 지어 글을 읽고 거닐며 후진을 가르침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인조 5년(1627) 정월 정묘호란에 여헌(旅軒) 선생이 징문(徵文)을 보내어 의병장을 삼아 막 군사를 일으켜 출진하였으나 난리가 평정되어 곧 파했으며, 또 병자호란을 당하여 다시 의병을 일으켜 서울을 향해 행군하여 막 기천을 지나 죽령을 넘어서다가 나라에서 강복했다는 비보를 듣고 통곡하고 군사를 해산했음이「매원일기(梅園日記)]에 적혀 있어 후학들의 사료로 참고가 되고 있다.
  • 글쓴날 : [2021-06-30 19: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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